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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리뷰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으로서 재판

by ccschool 2020. 5. 25.

 

[기고]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 이영기

이영기 ㅣ 변호사·민변 교육위원 사학비리로 지탄받던 수원대학교가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 6명을 파면하거나 재임용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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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것. 법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솔직히 이것 말고 별다른 수도 없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고소하면 되지." "일이 잘 안 되면 소송 걸어서 받아내면 되지." 이런 식의 생각은 갖지 않았으면 한다. 소송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예상은 자주 빗나가기 때문이다. 법은 나의 편이라는 생각은 대부분의 경우 맞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소송은 너무 오래 걸린다. 대법원까지 간다면 못해도 3년은 걸린다고 해야 하겠다. 위에 인용한 기사에는 대법원 판결만 6년째 기다리는 안타까운 사정이 나와 있다.

 

고문 변호사가 있고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대응해 줄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도 견디는 시간은 괴롭기 마련이다. 하물며 소송에 많은 것을 걸고 노심초사,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에게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고통이다. 설사 승소를 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되는 경우도 많다.

 

둘째, 법은 약자에게 너그럽지 않다. 미국에서 재판이 유색인종이나 여성에게 불리했음을 밝힌 비판 법학 운동(CLS)의 연구결과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 법을 다루는 것도 인간이 하는 일이다. 비싼 변호사를 사고 이러저러한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운동장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편향성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법적 경로를 밟는 데에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며 사법부는 전형적인 계급적 연대라는 점에서 법정은 어떤 경우에도 지배계급 이해관계로 크게 편향되어 있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세 번째, 법은 그렇게 세심하지 않다. 심급제(삼심제)를 통해 나의 사건이 반복해서 신중하게 다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심급제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다.

 

우리나라에서 2심 그러니까 항소심은 '속심' 구조를 가지고 있다. 1심에서 했던 재판을 이어서 하는 것이다. 1심에서 정리되었다고 판단하는 사항은 그대로 인정하고 그다음으로 계속된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이 아니다.

 

3심 그러니까 상고심은 '법률심'이라고 한다. 1심과 2심에서 확정된 사실관계(누가 누구를 때렸느냐,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떼였느냐 같은 문제)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그에 대한 법률 적용의 옳고 그름만을 검토한다는 말이다. 법률심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면 심리불속행 결정을 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대법원 구경도 못하고 재판이 끝나는 일이 벌어진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법에 호소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법원이 완전히 부정의하고 불공정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재판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다. 세상일이 생각 같지 않지만 가급적 법에 호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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